전남 고흥 가볼만한곳 소록도 <국립 소록도병원 한센병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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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고흥 가볼만한곳 소록도 

<국립 소록도병원 한센병 박물관>


소록도 여행

백 년의 숨결 한센병 

<국립 소록도병원 한센병 박물관>



꼭 다시 한 번 가보고 싶은 소록도. 그 이유는 오해로 가득 찼던 한센병에 대한 내 편견을 내려놓을 수 있었기 때문이고, 소록도의 아름다움이 가슴 깊이 와닿았기 때문이다. 소록대교와 거금대교가 놓여 전라남도 고흥에서부터 차로 쉽게 여행할 수 있는 섬, 소록도와 거금도는 전남 고흥 가볼만한곳으로 최고이다.


누구에게라도 추천해주고 싶은 이 섬, 찾아온다면 누구라도 실망할리가 없다.




소록도

입장료 : 없음

주차장 : 무료

개방시간 : 오전 9시 ~ 오후 5시


주의사항

섬 전체가 국립 소록도병원이며 한센인이 생활하는 공간이다. 지정된 장소 이외의 출입은 절대 금해야한다. 장애를 가지고 있는 한센인을 만날 경우 사고가 나지 않도록 조심한다. 소록도 전체에서 취사, 음주, 흡연이 금지된다.



수탄장 - 탄식의 장소


주차를 하고 중앙공원으로 가는 길은 소나무 숲길이다. 과거 이곳은 수탄장이라고 불렀는데 직원들과 한센병 환자들의 공간을 구분하는 경계지역이었다. 한센병이 감염된다고 믿었기 때문에 전염을 막기 위해 분리된 공간이다. 마치 비무장지대처럼 말이다.



한편 이곳은 병을 가진 자와 병을 가지지 않은 가족이 한 달에 한 번씩 만남을 갖는 장소였다. 가까이 다가갈 수는 없고 도로 양옆으로 마주서서 혈육을 눈으로만 바라보아야 했다. 그 어떤 접촉도 허용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곳을 '탄식의 장소'라 불렀다.



소록도는 작은 섬이다. 


전라남도 고흥을 지나 거금도 가기 전에 있는 아주 작은 섬. 소록도 여행은 국립소록도병원과 한센병 박물관 등 그 일대를 둘러보는 코스이다. 개인적으로 둘러본다면 1 ~ 2시간이면 되고, 해설과 함께 한다면 3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해설사와 함께 하는 여행은 약 1시간 정도이고 그후 개인적으로 둘러보는 시간이 추가된다.



해설사와 함께 하는 여행은 단체여행객의 경우 예약이 가능하다. 우리는 단체여행객 속으로 파고들어 해설사와 함께 여행할 수 있었다. 소록도 여행을 계획한다면 반드시 해설사와 여행하라고 추천하고 싶다.



핍박과 억압의 땅이었던 소록도

한센병을 이겨낸 그들의 흔적. 이제 우리의 이야기가 되었다. 국립 소록도병원 담에는 한센인들의 얼굴이 그려진 벽화가 있다.



소록도 갱생원 검시실, 감금실


1935년 5월에 건립되어 한센인들의 시신을 해부했던 아프고 슬프면서 끔찍했던 공간. 이곳 내부에는 당시 사용했던 해부대가 그대로 남아있으며 '군함도'를 비롯하여 일제강점기 영화의 촬영지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감금실로 들어왔던 한센병 환자들은 구금되어 가혹한 체벌을 당했다. 나갈 때 멀쩡했던 사람은 없었다. 남자들은 정관절제수술을 당해야만 했다. 한센병을 유전, 전염병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한센인은 3번 죽는다.


일제 강점기 한센병 환자들의 시체를 해부했던 곳. 그들에게 인권은 없었다. 일본인 마음대로 해부를 했고 바닷가에서 화장을 해버렸다. 검시대와 당시 시체 해부 후 이용했던 세척 시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한센인에게 '3번 죽는다'라는 말이 있었던 이유는 첫번째가 한센병, 두번째가 일본인에 의한 시신해부, 세번째는 화장이었다.




▲강제적으로 정관수술을 받아야만 했던 한센인의 시




조선나예방령에 의해 직업의 자유, 거주 이전의 자유, 이동의 자유를 모두 박탈당했던 그들. 이곳에 감금되어 금식, 체벌, 징벌, 강제노역, 온갖 학대를 받아야만 했다. 그에 항거하면 죽음이거나 불구가 되었다. 


모두다 이름이 있었고 모두다 사람이었지만

그들에게 인권은 없었다.



▲일제 강점기 불법적으로 감금했던 장소




교도소와 다름 없다.

이곳에서 얼마나 끔찍한 일이 있었던건가.

이유없이 죽어간 소중한 생명.



모든 것은 일본 때문이었다.


일제는 1933년 소록도 섬 전체를 매수했다. 그리고 전국의 한센병 환자를 강제적으로 모았다. 정당한 법적 절차도, 정확한 의사의 진단도 없었다. 그들은 재판을 받을 권리도 없었다. 저항할 힘은 누구에게도 없었다.



천주교회


전남 고흥 가볼만한곳 소록도에서는 얼핏 유럽의 느낌도 든다. 고 육영수 여사는 소록도와 한센병을 안타깝게 여기고 이곳에 와서 많이 보살펴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주변에 육영수 여사 공덕비도 있다. 



마느안느와 마가렛 수녀님


1962년 2월에 마리안느 수녀님이, 1966년 10월에는 마가렛 수녀님이 소록도를 찾아왔다. 같은 민족도 버렸던 그들에게 다가와 한센환자와 자녀들을 돌보아주었다. 한센병이 전염이라는 편견을 해소하고 우리나라 한센병 퇴치와 계몽에 큰 역할을 해주신 분이라고 한다.



죽어서도 이곳에 묻히고 싶다던 수녀님은 나이가 들어 자신이 오히려 소록도에 부담이 될까봐 2005년 11월 22일 편지만 남지고 이곳을 떠났다고 한다. 20대에 찾아와 자신의 모든 생을 이곳에 희생했던 오스트리아의 수녀님 이야기는 가슴 뭉클하다.



소록도 성당


천주교 신자에 한해 일부 들어가볼 수 있으며 평상시에는 외부인 출입금지이다. 해설사님과 함께하고 있어서 입장할 수 있었다. 이곳은 한센인의 치료와 주거 공간이기 때문에 외부인은 출입금지라고 한다.



▲성당에 있는 귀한 나무




소록도에는 중앙공원이 있다. 1939년 12월 1일 공사에 착수하였는데 완도, 득량, 일본, 대만 등에서 기암괴석과 나무를 사들여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정원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에는 스모원장이 있었다. 소록도 병원에서 1939년부터 1942까지 원장으로 재직하면서 온갖 학대를 일삼으며 소록도를 자신만의 궁전으로 만들려고 했다. 



세상에, 한센인들로부터 기금을 강제 징수하여 자신의 동상을 만들고 참배하게까지 만들었다고 한다. 그의 최후는 1942년 6월 20일, 한센인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 한센인은 일제에 의해 사형당했고 그의 동상은 태평양 전쟁 물자 조달을 위해 철거되어 지금은 없는 상태다.




소록도에서 가장 가슴 아픈 장소 - 벽돌공장


그 4대 원장이었던 놈이 벽돌제조 공장을 계획하고 이곳에 공장을 세웠다고 한다. 중일전쟁이 시작되면서 병원 제정이 어려워지자 한센인들에게 보수도 없이 강제노동을 시켰다. 환자들은 불편한 몸을 이끌고 나무를 해와야했고, 안 그래도 감각이 없던 손에 화상을 입으면서 병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반항을 하면 어김없이 감금실로 향했고, 나올 때는 불구가 되거나 정관수술을 받아야했다. 소록도에서 바다를 건너 고흥으로 탈출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수영이 미숙해서 그대로 빠져 죽는 이들도 있었고, 잡히면 고문이 있었고, 혹은 수영으로 탈출하고 있던 이들에게 총을 쏘기도 했다고 한다. 


벽돌공장이 있던 터 주변에 나무가 있는데 하늘로  솟지 못하고 가지가 자꾸 바닥으로 내려 앉는다. 그들의 한 때문이라고 한다. 전남 고흥 가볼만한곳 소록도에서는 가슴이 무너진다. 슬프고 아픈 역사의 현장이다. 



안티프라민 나무


어렸을 때 다친 부위를 막론하고 어디든 발랐던 안티프라민. 유한양행의 상징이 된 나무인데 이 나무가 소록도에 있다. 굉장히 귀한 나무라고 하던데 그래서 대한민국 제 18대 대통령이었던 그분이 이 나무를 그렇게 탐내고 뽑아가려고 했다고 그랬단다.



▲이곳이 국립 소록도 병원


절대 소란스럽게 지나다니면 안 되고 한센인을 보고 싶다는 이유로 기웃기웃 해서도 안 된다. 고흥 가볼만한곳 이곳에서 우리가 지켜야 한다. 일제 강점기에도 그들은 아팠고, 해방이 된 후에도 그들의 독립은 없었다. 그들이 아직 이곳에 있다.



국립 소독도 병원 한센병 박물관


입장료 : 무료

개방시간 : 소록도 개방시간 오후 5시까지



해설사와 함께 둘러본 시간은 1시간 정도였다. 


그 후에는 자유롭게 소록도를 둘러볼 수 있는데 큰 소리로 웃고 떠드는 것을 금해야 한다. 입장금지되어 있는 곳도 있기 때문에 안내판을 잘 보도록 해야한다.



날씨가 좋아 푸른 하늘이 가득했던 고흥 가볼만한곳 소록도. 

그런데 왜 이렇게 슬프고 마음이 무거웠던 걸까.

소록도 여행을 온 누구라도...




한센병 박물관 창가에서보니 소록대교가 뚜렷하게 보인다.

그들이 목숨을 걸고 탈출하고자 했던

일제 강점기 지옥의 섬.



이름이 있는 모두에게 마땅히 있어야만 했던 인권.

그렇지만 그들은 아니었다.




한센병 박물관은 온통 하얀 벽인데 마치 병원과 같은 느낌이었다. 한센병에 대해 이해하고, 그들이 어떻게 병을 극복했는지. 오해와 편견과 차별 속에서 힘들게 살아야만 했던 삶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성찰하게 된다. 


시대순으로 전시되어 있어 소록도와 병원의 백 년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공간으로 일제강점기, 광복, 전쟁, 가난, 좌절을 희망으로 바꾼 과정을 공감하며 관람할 수 있다.



▲한센인의 물건



시각 장애인용 지팡이와 검정고무신


걸음보다 앞서 앞에 장애물이 있는지 확인해야 했으므로 지팡이가 훨씬 길다. 손이 닳아 감각이 없던 그들은 예배를 마치고 자신의 고무신을 찾을 때 마지막 남아있던 혀의 감각으로 고무신을 찾았다고 한다. 눈물이 핑 돈다.




외부인 출입금지 안내를 철저히 지켜야하는 곳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하고 한센인들은 소록도 자치권을 요구했다. 이 과정 중에 다툼이 일어나 84명이 사망, 행방불명, 부상을 당했다고 한다. 그동안 숨겨져 왔다가 2001년 12월 유골발굴작업으로 세상에 전모가 드러났다.


1990년 대까지도 계속된 사람들의 억압

해방을 맞이했는데 그들은 언제나 죄인 같았고 인권도 없었다. 1991년 3월 실종된 개구리 소년. 초등학생 5명이 경북의 한센인 마을에 암매장 되어 있다는 허위제보와 언론의 오보로 한센인들은 또 한 번 서러움을 겪어야만 했다. 


불법으로 그들을 수색했는데 언론에서는 오히려 한센인의 폭력성만을 보도했다고 한다. 모든 것은 허위였지만 어느 누구도 한센인들에게 사과를 하지 않았다. 이렇게 부끄러운 일이 현대의 역사라니.



사람이 살고 있어 아름답다는 소록도는 풍경이 다른 남해안보다 훨씬 아름답다. 이렇게 아름다운 섬에서 상상하기도 싫은 끔찍한 일이 벌어졌었다니. 그들은 이제 한센병을 이겨냈고 섬의 슬픔과 희망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되었다.


일제 강점기 그들이 한센인에게 했던 악행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지만 해방 후, 같은 민족끼리, 90년대까지도 그들을 차별하고 인권을 존중해주지 않았던 우리의 모든 언행도 반성의 대상이다. 아름다운 섬 소록도, 백년의 숨결이 담긴 이곳에는 슬픔도 있고 희망도 있다. 누구에게라도 추천하고 싶은 여행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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